내 집은 세탁기가 방 안에 있다.
그래서 세탁기 배수 호스를 화장실로 빼서 써야 한다.
대부분의 경우(대부분이 아니라, 지금까지 딱 한 번을 제외한 모두) 호스를 화장실로 빼내는 일을 잊어버린 적은 없다. 하지만, 한 번 잊어버린게, 피해가 너무 크다.
세탁기를 돌려놓고, 밖에 나갔다 왔다.
핸드폰도 방바닥에 던져둔채.
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는데, 문을 열고서 허탈함에 주저앉고 싶었다.
방바닥엔 물이 넘실거리는데,
이미 이불도, 책도, 핸드폰도.... 다 젖어 있다.
수재민들의 마음에 이렇게 절절히 공감해볼 줄이야.
12시가 넘은 그 시각, 대체 잠은 어떻게 할 것이며. 책장 1층에 꽂혀 있는 책들까지 이미 퉁퉁 불어버린,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.
별수 있나. 열심히 물 퍼내는 수 밖에.
거의 밤을 새서 퍼냈다.
뜻하지 않게 방바닥 전체를 비눗물로 씼어냈다. 구석구석 숨어있던 먼지까지도 모두 쓸려나왔다.
그래도 핸드폰은 물에 다시 잘 빨아서 말리니 이상없이 된다.
그동안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모아뒀던 출력물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.
책들은 온통 쭈글쭈글해졌지만, 넘겨 보는데 별 지장은 없다.(그래도 이미 절판된 책들.. 구하기 힘든 책들.. 어흑.. ㅠ.. 아까워라..)
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.
작년 시험기간이었지, 꼭 평소에는 안하는 빨래를 시험기간에는 하게 되는데, 세탁기 돌려놓고 별 생각없이 앉아있으려니까,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. 세탁기가 터졌나? - 사태파악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물이 이미 방 저편까지 번져가고 있다. 그 때서야 물을 토해내고 있는 호스가 보인다. 그래도, 그 땐, 내가 방안에 있던지라, 큰 피해 없이 수습할 수 있었다. 이불이 젖기 전에 이불을 걷어낼 수 있었고. 책도 들어낼 수 있었고.
이번엔, 세탁기가 물을 네 번 토해내는 동안,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. 피해의 정도를 떠나서, 그런 일을 한 번 쯤 겪었으면, 다신 안그럴 법도 하건만, 이놈의 머리는 학습능력이 너무 떨어진다.
누구는, 내가 방을 너무 함부로 써서, 세탁기가 화낸거라고 표현한다. 그게 맞을지도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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